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대가 아는 조선은 죽었다. JOY를 표하도록 하지 (문단 편집) ==== 일본 ==== 대진을 이은 제2의 주인공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진과 청, 후명이 천명대전을 하는 와중에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다.''' 그러다 진 태조때 진의 협박과 해상봉쇄에 굴복하여 진에 입조하게 되고, 영국의 개수작과 시미즈의 반란으로 내전이 일어나자 막부는 대진에 헬프콜을 친다. 이에 여칠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한 태종은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상국으로 여칠지를 임명하여 도쿠가와 막부에 유교정 이식을 시도하나 토속신앙에 밀려 번번히 실패한다. 와중에 인간 트로피인 덴노를 전전조 폐왕쯤으로 오해하고 덴노에게 도쿠가와 막부에 선양할것을 권하고, 덴노도 기꺼이 받아들여 시고쿠로 향한다.[* 후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데, 덴노가 쇼군에게 직접 선양한게 아닌 상국 여칠지에게 선양했기 때문. '''즉 직접 선양이 아닌 대리선양인 셈이다.'''] 태종 사후 여칠지는 귀국하고, 모이제가 다시 상국으로 부임한다. 그 또한 일본에 성리학을 주입하고자 시도하고 어느정도 성과는 거두나, 재앙신 여칠지 VS 선신 도쿠가와 이예야스라는 환장할 신화가 탄생하는것으로 실패, 결국 사망하고 [* 왜에 파견될때 이미 나이가 '''74살이었다.''']아들 모조묘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성정으로 진의 정치적 혼란기와 섭정의 수렴청정이라는 상황을 이용, 섭정에게 뇌물을 바쳐 종신상국의 지위를 얻고 백성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섭정에 빌붙던 그는 세종의 친정 이후 급변하는 상황파악에 실패하여[* 진 조정에 대충 ''''섭정님 이번달 상납금 좀 늦어요ㅎㅎ''''라는 내용의 장계를 보내고 이를 받은 세종은 폭소하기에 이른다.]결국 모조묘는 처형당하고 정동행성은 폐지된다. 정동행성 폐지 이후로도 텐메이 대기근과 막부의 방치에 난세가 수습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덴노가 유생과 잇키의 반란에 힘입어 일본의 통치자가 된다.[*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한데, 낙향한 천황 도시코를 그녀를 모시던 궁녀 후토가 따라 모시고 후에 유학자인 아큐가 그녀를 찾아온다. 이후 궁녀가 몸을 팔아 번 자금으로 덴노와 아큐가 유생들을 가르치던 중, 텐메이 대기근으로 일본 전역이 도탄에 빠지고 덴노가 복귀할 절호의 기회라 여긴 후토가 희생하여 손수 격문을 띄워 잇키들을 일으켰다.] 일본 전역의 혼란에 진의 책임이 컸던 탓에[* 진에서 파견한 상국인 모조묘가 본국에 뇌물을 바쳐 종신상국으로 등극, 일본을 수탈한건 물론 전조가 멀쩡히 남아있음에도 선양을 강요했다. 물론 덴노 본인은 희희낙락하며 귀향했으나 정상적일 천조질서에선 있을수 없는 일이며, 더더욱 진이 일왕으로 앉힌 도쿠가와가 대기근때 수습은 개뿔 주지육림을 즐겼기 때문. 도의적 책임이든 유학적 책임이든 진이 책임이 컸다.] 이례적으로 진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고, 아큐는 이들을 대접하며 간접적으로 부마국 지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진 세종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아큐가 직접 베이징에서 5일간의 오체투지 끝에 수습에 성공하나 진에게 뜯어낼 수 있었던 명분들을 현찰로 땡처리 받고 아큐도 오체투지의 여파로 사망한다. 아큐 사후, 뜻을 이어 완벽한 중앙집권과 유교정 이식에 성공한다. 유자의 나라가 된 일본은 진의 충실한 1번국이 되어 베트남과 더불어 진의 수족이 되며 조선이 명에게 했듯이 진을 선망하고 동시에 경계하게 된다. 이후 동남아와 인도로 진출하여 말라카와 실론이라는 알짜배기 땅을 주워먹는다. 이후 유럽과 인도의 혼란을 계기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이때 유가적 이상사회를 그리는 메이지 덴노와 국제사회에서의 경험부족으로 외교의 방향성이 낭만주의적 외교로 굳어진다. 인도를 정벌한 프랑스가 무차별적으로 인도인들을 학살하자, 일본은 차라리 자국으로 추방할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미 맛이 가버린 프랑스는 이를 거절하고 학살을 계속했고, 결국 일본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기 이른다. 인도인을 구하고자 선전포고한건 좋았으나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에 해군력을 신속히 투사할수 있었고 결국 일본은 참패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랑스는 인도의 인종청소에 집중하느라 실론과 해외로 도망치는 인도인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일본은 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흥남철수 마냥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가는 수준으로 인도인들을 대피시켰고 4500만의 인도인들을 살리는데 성공한다. 전후 일본은 이러한 만행[* '''2억명의 인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에 분개하여 프랑스를 증오하게 되었고, 결국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대 프랑스 연합이 결성되어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베트남과 함께 인도를 재침공하여 결국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전후 인도에 남은 백인들을 귀국시키나, 유가적 사상의 한계로 강제추방을 거부하고 교화와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인도인의 백인에 대한 원한은 깊었고[* 당장 눈에 보이던 인도인들을 모조리 죽인게 프랑스였고, 길가다 백골이 굴러다닐정도로 죽였으며 그 경험자들이 살아서 다시 인도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수백년간은 국민감정이 험악해지는건 필연적이었다.] 베트남과 연합으로 치안유지와 군정을 실시하고 진의 도움으로 각종 구호물자와 구호인력으로 상황을 호전시키려고 하나 실패한다. 결국 파키스탄 지역에 남은 백인들을 몰아넣어 독립시키고 도주하던 프랑스의 인도총독을 프랑스의 송환요구를 거부하고 전범재판에 세워 처형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하나...겨우 그정도로 일이 해결될 리가 없었고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학살에 동조한 프랑스인들은 본국이나 알제리로 튄지 오래였다. '''즉 전후 인도에 남은 백인들은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일본은 마음이 꺾기게 되고, 베트남과 함께 20년의 군정 후 인도에서 완전철수 하기로 한다. 군정 설치 후 대진, 베트남과 전후복구를 계속한다. 복구작업 중 인도의 식민통치 기간에 프랑스가 인도인들을 구덩이에 대충 몰아넣고 대량학살을 벌인탓에 도로변에 백골이 대충 굴러다니는 개막장 사태가 오고, 급기아 대진 성종이 백두산에 올라 진혼제를 지내고 유골들을 수습하는 초유의 상황에 이른다. 이런 상황까지 가자 베트남, 러시아, 공화제국, 브라질과 국제연합을 창설하여 본부를 중립국(?)인 대진 홍콩에 두고 프랑스도 이사국으로 초청한다.[* 대진이 빠진 이유는 대진 혼자 나머지를 쌈싸먹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프랑스가 희희낙락하며 승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국제 사법재판을 열고 인도에서의 학살 혐의로 프랑스를 기소한다. 프랑스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나 일본의 철저한 증거수집과 프랑스의 자폭으로 프랑스는 패소, 정의구현에 성공한다.[* 국제연합 창설과 프랑스의 기소에 총대를 맨 사람이 바로 작중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다.''' 프랑스 대사에게 삿대질을 하는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